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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브랜드의 역사 포드와 토요타

by dan-83 2023. 10. 10.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연 포드 

 

초기의 자동차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수제품으로 제작되다 보니 값도 비싸고 유지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서민들에겐 사치품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100여 년 전 이런 고가의 자동차를 대중들에게 안긴 이가 있으니, 바로 자동차 대중화의 초석을 쌓은 '자동차왕' 헨리 포드 (Henry Ford)다. 

 

포드가 젊은 나이에 자동차를 바라보며 가진 꿈은 '부자들의 전유물인 자동차를 서민들의 생필품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으며 오늘의 역사는 부침을 거듭한 끝에 최초로 값싸고 튼튼한 차를 대량 생산한 인물로 포드를 기록하고 있다. 

 

 

헨리 포드

 

포드 자동차 회사의 창설자인 헨리 포드는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와 인연이 깊었다. 그가 어렸을 적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말을 타고 이웃 도시로 의사를 데리러 갔다. 하지만 그가 의사와 함께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운명을 달리했고, 슬픔에 젖은 그는 ‘말보다 더 빠른 것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고장 난 시계를 만지작거리던 어린 소년 포드는 어느 날 우연히 증기자동차를 처음 목격하게 되는데, 본격적으로 자동차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게 바로 이때였다. 

 

이후 그는 에디슨의 전기회사에 들어가 일하기도 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내내 자동차에 있었다. 그는 직접 가솔린 차량을 제작했으며 자신이 만든 자동차에서 문제가 발견되자 도끼로 자동차를 부순 일화도 남겼다.

  

헨리 포드와 '모델 T'


  
   

헨리 포드가 처음 자기 이름으로 자동차 회사를 차린 것은 1903년이다. 그는 자본금 10만 달러와 노동자 12명으로 포드 사를 설립했다. 지인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미국 미시건 주 디어본(Dearborn)에 공장을 마련한 그는 5년 후인 1908년,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모델 T’를 세상에 내놓는다.

 

 ‘모델 T’는 1999년 ‘세기의 자동차’에 선정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은 자동차였다. 이후 1913년 포드 사는 첫 대량 생산 시스템인 ‘컨베이어벨트 조립라인(conveyor-belt assembly lines)’을 개발·도입해 미국 최대의 자동차 회사로 우뚝 서게 된다.

  미국인들이 헨리 포드를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드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자동차 대중화의 실현 그리고 중산층의 확대, 부의 재분배 등이 그것이다. 포드의 성공과 자동차 대중화 모두에 혁혁한 공을 세운 포드 ‘모델 T’는 1903년 제작에 들어가 1908년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피켓 공장(Piquette Plant)에서 본격적인 생산·판매에 들어갔다. 

 

‘모델 T’는 배기량 2,900cc 4기통 엔진을 달고 22마력의 출력을 냈으며 시속 60km/h로 달렸는데, 첫 판매 시작 후 1927년까지 약 18~19년 사이에 1,500만 대 이상을 판매했다. 이는 토요타의 코롤라(Corolla), 폭스바겐 비틀과 함께 ‘세계 3대 베스트셀러 자동차’로 기록되었다.

 

포드사의 컨베이어벨트 조립라인

 

포드가 세상에 처음 내놓은 ‘모델 T’의 천문학적인 판매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가격경쟁력 덕분이다. 보통 차 구입가가 대당 2,000달러를 넘어서던 시절, 서민들에게 자동차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모델 T’는 평균 자동차 구입가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850달러였다.

 

따라서 당시 중산층에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다.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조립공정 시스템의 도입도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데 한몫을 했다. 포드는 1913년 말 ‘컨베이어벨트 조립라인’을 세계 최초로 소개하면서 섀시 조립에 걸리는 시간을 기존 12시간 30분에서 2시간 40분으로 단축하는 믿지 못할 결과물을 내놓았다.

 

이로써 3분에 한 대씩 조립이 가능했고, 노동시간은 10분의 1 수준으로 단축됐다. 이렇게 원가절감으로 이어진 효과는 급기야 300달러 이하로 자동차를 판매 가능하게 만들었다. 조립공정의 자동화는 차량 공급의 급속화를 가져왔고, 이 흐름은 중산층의 확대로 이어져 결국 미국 경제가 세계를 주도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하게 된다.

  포드에서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미국인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머스탱(Mustang)’이다. 1964년 3월 9일 디어본 시에서 생산된 머스탱은 같은 해 뉴욕세계박람회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생전 스포츠 경주대회를 무척이나 즐겼던 헨리 포드의 작고 이후 이런 명차가 개발됐다는 사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머스탱의 흥행몰이는 실로 대단했다. 

 

머스탱은 주행성과 실용성, 가격경쟁력 등에서 호평을 받으며 출시 첫해 40만 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후 수많은 자동차 회사들이 이를 벤치마킹했으며 1999년 ‘세기의 자동차’에 선정되는 등 머스탱은 자동차 역사에 기념비적인 차로 기록되었다. 높은 인기를 반증하듯 머스탱 시리즈는 영화에도 단골로 등장했다. 

 

자동차 추격전의 대명사 <블리트(Bullitt, 1968)>와 영화 007 시리즈 <골드 핑거(Gold Figer, 1964)>, 우리나라에 소개된 미국 드라마 <전격 Z작전>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후 진화를 거듭한 머스탱은 오늘날까지 남성들의 질주본능을 자극하면서 여전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포드&nbsp;Mustang&nbsp;302&nbsp;(2013)



    

  

  한편 포드는 1989년 영국의 애스턴 마틴, 재규어, 다임러(메르세데스 벤츠의 모기업인 다임러 AG가 아닌 재규어 자동차의 사업부) 그리고 랜드로버를 사들였으며 스웨덴의 볼보자동차도 인수했다. 또 일본 마쓰다의 지분 33.4%를 확보해 포드 산하의 회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쓰다와 미국 미시건 주 플랫 록(Flat Rock)에 ‘오토 얼라이언스 인터내셔널(Auto Alliance International)’이라는 조인트 벤처 공장을 설립한다. 오토 얼라이언스 인터내셔널의 부품 사업부는 이후 비스티온(Visteon)으로 분사(分社)한 바 있다.

  

  
    

포드&nbsp;사의&nbsp;엠블럼




  

  

  포드는 애스턴 마틴, 볼보, 재규어, 랜드로버를 묶어 ‘PAG(Premier Automotive Group)’라는 고급 자동차 브랜드 그룹으로 묶었으나 사정이 악화되어 2007년 프로드라이브(Prodrive)에게 애스턴 마틴을, 2008년에 인도 타타 그룹(Tata Group)에게 랜드로버와 재규어를 매각하였고, 2010년 8월 볼보를 중국 지리(吉利)자동차에 매각하였다. 

 

따라서 인수를 통한 고급 브랜드 그룹 계획은 4사를 모두 매각해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마쓰다의 지분 또한 현금 확보를 위해 주식을 매각, 현재 약 13.4%의 지분만 보유하고 있다. 2010년 말에는 판매 부진을 이유로 머큐리 브랜드를 폐기해 포드 본 브랜드와 고급 브랜드인 링컨만 남아 있다.

  

 


  

  소년 사키치의 효심으로 시작된 토요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일본의 토요타(Toyota)는 가난한 소년의 효심에서 시작됐다. 1867년 일본 시즈오카현(靜岡縣)의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토요타 사키치(豊田佐吉)가 태어났다. 목수인 아버지를 따라 집안의 장남으로서 가업을 이어야 했기 때문에 사키치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

 

러나 사키치는 마음속에서 다른 길을 걷고자 했다. 비록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훈련도 받지 못했지만, 당시 산업혁명으로 인한 근대화의 영향으로 시골 소년 사키치는 발명가가 되었다는 큰 꿈을 꾸게 된다.

 

 

토요타 사키치가 제작한 자동직기


  

  
소년 사키치가 눈을 뜬 분야는 바로 베틀.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베틀을 돌리며 고생하던 모습을 보고 자란 사키치는 반드시 보다 쓰기 편한 직기를 만들어 고품질의 직물로 생활을 윤택하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의 직물은 사람의 손으로 직접 짠 거친 베였다. 

 

가업을 잇기 원했던 그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키치는 밤낮으로 직접 설계도를 그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1894년 지금까지 두 손을 사용해야 했던 베틀을 한 손으로만 작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의 첫 발명품인 ‘토요타식 목제인력직기’였다. 이는 기존 베틀에 비해 50% 정도 빨리 직물을 만들 수 있는 베틀이었다. 

 

하지만 사키치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사키치는 기존 제품의 개선에 다시 개선을 거듭했다. 불편한 점이 발견되면 끊임없이 연구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냈다. 1894년부터 1914년까지 그가 개발한 대표 직기는 총 여섯 개에 달한다. 

 

이러한 끊임없는 개선정신이 오늘날 토요타자동차의 경영정신 ‘Toyota Way’를 이루었고, 그 양대 축의 하나인 ‘끊임없는 개선’의 모태가 되었다. 또 이러한 개선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편하게 해주겠다(Respect to People)’로 이어져 토요타의 경영철학을 완성하게 된다.

 

토요타 사키치



  1924년 사키치는 그의 일생일대 대작인 ‘G형 자동직기’의 개발에 성공했다. ‘G형 자동직기’는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자동직기로 평가받는다. 당시 동경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의 아들 토요타 키이치로(喜一郞)는 대학 졸업 후 엔지니어로서 아버지의 자동직기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며 자동직기 개발 및 생산과정에서의 노하우를 토대로 훗날 토요타자동차를 설립하게 된다.

 

‘G형 자동직기’의 품질이 어느 정도였나 하는 예로 직기의 실이 끊기면 작업자의 안전을 위해 자동으로 직기가 멈추는 기능까지 갖고 있었다. 이는 실제 향후 토요타자동차 생산라인의 ‘라인스톱(불량이 발생하면 누구든지 라인을 스톱할 수 있는 장치)’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G형 자동직기’의 성공으로 사키치는 1926년 ‘토요타 자동직기제작소’를 설립한다. 

 

하지만 일생의 대작을 완성하고 얼마 안 되어 1930년 토요타 사키치는 타계한다. 평생 끊임없는 발명의 삶을 살았던 사키치는 타계하기 몇 년 전 미국과 유럽 방문을 통해 앞으로 자동차가 새로운 산업의 축으로 부상할 것임을 예상한다.

  GM과 포드 등 미국 업체들이 세계 자동차 산업을 좌지우지할 당시 사키치는 반드시 자신들의 손으로 국산승용차를 만들어보겠다는 새로운 신념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러기에 그는 너무 늙고 쇠약했다. 그는 그가 일궈놓은 ‘G형 자동직기’의 특허권을 영국 회사인 플랫 브라더스(Platt Brothers)에 매각해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만 엔을 손에 넣게 된다. 

 

사키치는 당시 동경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아버지의 회사에서 새로운 직기 개발에 열중이던 장남 키이치로를 불러 “이 돈을 네가 모두 가질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이 돈을 반드시 자동차 연구에 사용해라. 반드시 우리 손으로 국산승용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유훈을 남겼다.

 

토요타자동차의 창업자 토요타 키이치로



  
    아들 키이치로는 막막했다. ‘어떻게 우리가 GM이나 포드 같은 거대 회사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시도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래서 키이치로는 미국 출장에 올랐다. 그는 미국 자동차 회사의 조립라인과 부품라인을 둘러보고 돌아와 토요타 자동직기제작소에 ‘자동차사업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십여 명의 직원과 함께 끊임없이 엔진을 분해하고 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엔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키이치로는 다시 한 번 미국 출장 당시 본 것들을 되새겨보고 두 가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는 그들이 매우 정확한 규격의 부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품질의 엔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재와 도구를 사용했다. 둘째는 조립라인과 같이 대량생산을 위한 방법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여기에는 직기를 생산하던 컨베이어 시스템을 응용했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키이치로는 끊임없는 개선과 불굴의 의지로 마침내 1934년 최초로 토요타 프로토타입 엔진 개발에 성공한다. 결국 1935년 5월 토요타의 첫 프로토타입 승용차인 모델 ‘A1’이 탄생하게 되고 1936년 마침내 국산승용차의 판매를 시작한다.

  

 

토요타자동차의&nbsp;첫&nbsp;모델&nbsp;&lsquo;A1&rsquo;


     

    토요타자동차의 첫 모델 ‘A1’
  

  

  본격적으로 차를 판매하면서 그들은 브랜드의 이름을 보다 쓰기 쉽고 현대적인 ‘토요타’로 바꾸었다. 그리고 ‘A1’의 개량형인 ‘AA’부터 ‘토요타’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게 된다. 이어 1937년 키이치로는 보다 효율적으로 고객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변화를 감행, 토요타 자동직기제작소에서 분사해 아이치현(愛知県) 코모로(오늘날 토요타 시)에 대규모 생산라인을 건설하고 토요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공장 건설 이후 키이치로는 생산시스템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가가 낮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코모로 라인에 증설되는 라인에는 전혀 낭비가 없었다. 그는 어떻게 부품을 이동시키는지, 한 작업에 얼마나 많은 인원의 사람이 필요한지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라인에 반영했다.

 

그 결과 시장수요에 맞게 생산규모를 계속 확대할 수 있었다. 토요타 생산 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저스트 인타임(Just - in - time)'의 시초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토요타자동차 엠블럼

 

 

 

하지만 태평양전쟁을 겪은 일본의 역사 속에서 토요타자동차 또한 위기를 맞게 된다. 패전 뒤 심각한 디플레이션으로 회사가 여려워지자 키이치로는 노조와 '인원감축은 절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토요타키이치로는 "사람을 해고하지 않는 것이 경영자의 도리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회사는 경영자의 소유가 아닌 임직원 모두의 소유다'하는 토요타의 경영철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토요타자동차 엠블럼

 

 

1974년 토요타는 첫 소형차 모델인 'SA'를 선보였으나 회사 상황은 더욱 악화돼 1949년도 도산 지경에 몰렸다. 간신히 얻은 은행의 협조 융자 조건에는 대대적인 인원 감축이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토요타는 유일한 파업을 맞는데 노사는 이를 계기로 상호신뢰와 존중의 원칙을 굳히고 이를 오늘날 성장의 가이드 역학을 하고 있는 기업 철학으로 확립했다.

 

토요타의 생한 시스템은 1950년대 들어서 개선 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토요타의 생산표준화인 '토요타 프로덕션 시스템(Toyota Production System)'으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토요타자동차는 1959년 첫 해외 생산기지인 브라질 공장을 시작으로 글로벌 생산기지의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확충해 나갔는데 이때부터 현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철학은 현지 공급업체들과 장기적으로 상호 유익한 관계를 만들어 주었으며 현지에 고용된 직원들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토요타 프로덕션 시스템은 'TPS'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이 시스템의 목표는 자원의 낭비를 없애는 것이었다. 

 

토요타 Auris Hybrid (2013)

 

 

 

이를 위한 대표적인 수단인 'JIT(Just-in-time) 시스템'은 협력업체와의 부품재고량을 거의 제로에 가깝게 유지해 필요할 때 필요한 부품을 가지고 제때 필요한 차를 만드는 것으로 토요타의 대표적인 경영방식이 된다. 

 

또 끊임없는 개선을 통한 발전을 의미하는 '카이젠(改善, 개선)'과 '토요타 웨이(Toyota Way)' 또한 토요타 공장 및 협력업체들에게 재고와 결함을 줄여주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이는 전 세계 토요타 사업을 떠받드는 근간을 이루고 있다.

현재 토요타자동차는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자동차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아울러 자동차를 통한 사회 번영과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적인 기업의 모습으로 장애인을 위한 자동차, 환경을 위한 자동차 등 최초의 시도와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출처  :   브랜드를 알면 자동차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