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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로망, 페라리 그리고 엔초 페라리

by dan-83 2023. 10. 6.

남자의 로망, 페라리 그리고 엔초 페라리

 

이탈리아 최고의 스포츠카 브랜드 '페라리(Ferrari)'는 1947년 자동차 레이서로 유명했던 엔초 페라리(Enzo Ferrari)에 의해 이탈리아 마라넬로에서 탄생했다. 레이스와 스피드에 한평생을 바친 고집스러운 이탈리아의 장인 정신이 오늘날의 페라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창립자 엔초 페라리가 남긴유산은 페라리의 명성 그 이상이다. 창업주의 이러한 정신을 통해 페라리는 완벽한 성능을 갖추게 되었고,여기에 이탈리아 유명 디자인 업체인 피닌파리나(Pininfarina)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스타일이 더해져 전세계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엔초 페라리



1898년 2월 18일 이탈리아 모데나 (Modena)에서 태어난 엔초 페라리는 1988년 8월 14일 아흔 살의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회사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스포츠카의 설계 및 제작, 그리고 트랙에일생을 바친 그는 1924년 알파 로메오(Alfa Romeo)의 공식 선수가 된다. 

 

그로부터 5년이 채 지나지 않아그는 모데나의 비알레 트렌또 트리에스떼(Viale Trento Trieste)에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Ferrari)'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스쿠데리아 사는 엔초 페라리가 알파 코르세 (Alfa Corse) 사의 레이싱 매니저가 되던 해인 1938년까지 알파 로메오 차량의 레이스를 지원했으며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의 차로 경주에 참가했다.

 

자동차 레이서 시절의 엔초 페라리

 


엔초 페라리는 1년 후인 1939년에 퇴임해 기존 스쿠데리아 페라리 본사에 자신의 회사인 오토 아비오코스트루찌오니(Auto Avio Costruzioni)를 설립, 낡은 스쿠데리아 건물에서 사업을 시작한다. 이 신설 회사는 1,500cc 8기통 815 스파이더를 제작했으며, 그중 2대는 1940년에 밀레 밀리아(Mille Miglia) 경주를 위해 제작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든 자동차 경주가 중단됐고, 1943년 말 오토아비오 코스트루찌오니 작업장은 모데나에서 마라넬로로 이전했다. 1944년 11월과 1945년 2월의 폭격에도불구하고 생산은 계속됐다.

 

 

Auto Avio Costruzioni 815 (1940)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디자인과 자동차 생산이 재개돼 페라리의 첫 번째 차량인 1,500cc 12기통 125Sport'가 탄생했다. 이 차는 프랑코 코르테즈(Franco Cortese)에 의해 1947년 5월 11일에 열렸던 삐아첸짜(Piacenza) 서킷에서 데뷔했다. 2주 뒤인 그 달 25일에는 떼르메 디 까라깔라(Termedi Caracalla) 서킷에서 열린 로마 그랑프리(Rome Grand Prix)에서 우승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페라리의 차들은 전 세자동차 경주에서 5,000회 이상의 우승을 달성하게 되고, 그 명성은 오늘날까지 전설처럼 이어져 오고있다. 2010년 말까지 페라리는 15회, 16회, 14회, <르망 24시(Le Mans 24 Hours)> 우승 9회, <밀레 미그리아(Mille Miglia)> 우승 8회, <타르가 플로리오(Targa Florio)> 우승 7회, 우승 215회를 기록하며 전세계인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페라리는 F1에서의 뛰어난 기술을 도로주행용 차량에 접목시켜 개발함으로써 혁신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모델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F1 그랑프리>에 참가한 페라리의 경주용 자동차


1969년 엔초 페라리는 늘어나는 시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회사 지분 중 50%를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 그룹(Fiat Group)에 매각했으며 그 지분은 1988년에 이르러 90%까지 증가했다. 페라리의 자본 지분은 현재 피아트 그룹 90%, 피에로 페라리 10%로 나뉘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라리는 제품의 특수성 덕분에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운영되어 온 게 사실이다. 1977년에는 1950년대부터 페라리의GT 섀시와 차체를 만들어온 카로체리아 스칼리에티(Carrozzeria Scaglietti)라는 모데나의 자동차 디자인 및 설계회사가 페라리에 합병됐다. 

 

1997년에는 피아트가 1993년 인수한 모데나의 전설적인 브랜드 마세라티의 지분 중 50%를 페라리에 넘겼고, 1999년에는 페라리가 마세라티 (Maserati)의 지분 100%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마세라티는 모데나의 역사적인 스포츠카 제조사였고 탁월함과 우아함의 대명사였으며이탈리아 경주용 자동차계의 지지 않는 별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또 페라리의 오랜 라이벌이기도 했다. 마세라티의 새로운 출발은 페라리 경영진의 진두지휘 하에 진행됐고, 마세라티의 모델과 공장단지 전부가 철저히 재정비됐다.


카로체리아 스칼리에티의 페라리


페라리를 상징하는 '도약하는 말' 모양의 전설적인 문양, 프랜싱 호스(Prancing Horse)의 유래에는 간단하지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영웅적인 기원이 담겨있는 이 문양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비행기 조종사 프란체스코 바라카(Francesco Baracca)가 자신의 비행기 기체에 그려 넣었던 것으로 '바라카의 말(Baracca's Cavallino)'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23년 레이서로 활약했던 엔초가 첫 우승을 차지했던 사비오(Savio) 레이스에서 바라카의 부모를 만난 이후, 엔초의 레이스에 감명 받은바라카의 부모는 행운을 기원하며 아들의 까발리노 람판떼(Cavallino Rampante, 뒷발로 뛰어오르는 말)문양을 엔초에게 선사했다. 이후 엔초는 프랜싱 호스와 노란색 방패 문양을 형상화하여 페라리의 상징으로사용하기 시작했다. 로고의 바탕인 카나리아 노란색은 그의 레이싱팀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본거지인 마라넬로의 상징 색깔이다.

 

 

 

페라리의 엠블럼



현재 사각형 프레임의 프랜싱 호스 로고는 경주용 차량과 도로용 양산차 등 페라리에서 생산하는 모든 차량의 로고로 사용되고 있고, 방패형 프레임과 프랜싱 호스 로고는 페라리 레이싱팀을 상징한다. 또한 페라리 차량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붉은색은 1900년대 초 국제자동차협회(International Automobile Federation)에서 개최한 그랑프리 경주에서 이탈리아 차량에 부여된 색이다.

사각형 프레임의 프랜싱 호스 로고



레이서 출신의 루이스 쉐보레와 GM의 만남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eneral Motors)는 쉐보레(Chevrolet)를 중심으로 캐딜락(Cadillac)과 뷰익(Buick), 복스홀(Vauxhall), 오펠(Opel), 홀든(Holden), GMC(General Motors Company) 그리고 한국GM을 보유한 거대 기업이다.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GM이 'GM대우'에서 '한국GM'으로 사명을 바꾸고 전격 도입한 쉐보레는 GM의 핵심 브랜드로 미국의 유명 레이서였던 '루이스 쉐보레(Louis Chevrolet)'에서 비롯됐다.


루이스 쉐보레



GM은 윌리엄 듀런트(William Durant)가 1904년 뷰익의 지분을 사들여 1908년 창립된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로 1911년 루이스 쉐보레가 세운 쉐보레를 인수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11년 100주년을 맞이한 쉐보레는 GM 내에서 판매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GM의 글로벌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쉐보레는 1900년대 초 뷰익을 몰고 레이스 경주에서 우승하며 유명세를 탄 루이스 쉐보레가 GM의 설립자인 윌리엄 듀런트를 만나면서 탄생한다. 1911년 11월 두 설립자는 쉐보레 자동차 회사를 세우고, 1912년 말 '클래식 식스(Classic Six)'라는 첫 양산차를 내놓는다.

 

 

 

쉐보레의 첫 양산차 Classic (1912)



쉐보레 브랜드를 만들게 된 것은 당시 루이스 쉐보레의 명성이 워낙 높고 발음도 좋아 듀런트가 직접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이 결실을 맺은 쉐보레의 첫 모델 '클래식 식스'는 4.9리터 엔진을 장착하고, 최고 속도 65마일의 강력한 성능을 바탕으로 제법 큰 인기를 모았다. 

 

또 쉐보레 브랜드를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쉐보레는 당시 최고의 경쟁자였던 포드와 경쟁하기 위해 1914년2.8리터 엔진을 얹은 '490' 모델을 선보인다. 차량의 가격인 490달러를 모델명으로 사용한 '490'은 1927년 백만 대 판매 기록을 세우며 포드의 이전 기록을 경신한다. 

 

쉐보레는 이후 콜벳(Corvette), 카마로(Camaro) 등의 혁신적인 스포츠카와 머슬카를 개발하며 포드와 경쟁을 벌였고, 소형차 쉬베트(Chevette)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에서 제미니(Gemini)는 이름으로 생산돼 국내에서 판매되기도 했다. 나비넥타이 모양인 쉐보레의 독특한 엠블럼은 1913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그 이전에는 쉐보레의 서명이 디자인된 엠블럼이 사용됐다.

 

 

백만 대 판매 기록을 세운 490 모델 (1927)


GM의 창업자인 윌리엄 듀런트가 1908년 파리를 방문했을 때 자신이 묵은 호텔방의 벽지에서 창안한엠블럼은 초창기에 짙은 푸른색을 사용하고 나비넥타이 모양 가운데 'Chevrolet'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1960년대까지는 다양한 형태로 엠블럼 모양을 발전시키면서 1960년대 말부터 푸른색에 은색과 금색 등여러 색상을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1980년도에는 가운데가 빈 빨간색 테두리의 쉐보레 엠블럼이 사용되기도 했다. 보석 형상의 금색 나비넥타이 형상의 엠블럼이 본격 사용된 것은 2003년 SSR 모델에 처음 적용하면서부터다.

 

쉐보레의 대표적인 머슬카 Camaro



 

쉐보레의 엠블럼




사실 쉐보레 브랜드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신진그룹이 1972년 토요타와의 기술제휴를 끊고, 그해 GM코리아를 설립해 승용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쉐보레 1700, 레코드1900 등을 통해 이미 소개된 적이 있다. 그리고 30년 만에 다시 도입된 쉐보레 브랜드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장을 바탕으로 GM이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에 이어 3위 메이커로 도약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출처  :   브랜드를 알면 자동차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