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리전트 퍼포먼스의 철학, 포르쉐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1930년 ‘Dr. Ing. h. c. F. Porsche’라는 긴 이름의 회사를 설립한 뒤 히틀러가 요청한 독일의 국민차를 개발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체포돼 20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아들과 함께 그동안 잠시 개발을 늦춰왔던 자동차를 다시 완성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로 사랑을 받고 있는 포르쉐다.
포르쉐는 끊임없는 기술 개발을 통해 60여 년간 르망 24시(스포츠카 내구 경주대회)와 모터스포츠에서 2만 8천여 회 우승을 차지했다. 따라서 모터스포츠 무대를 바탕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르쉐는 극한의 성능이 요구되는 레이스를 통해 고성능 스포츠카 개발에 필요한 노하우를 쌓아가며 자동차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포르쉐의 엔지니어들은 모터스포츠의 경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차량을 만들어내는데, 그 바탕에는 ‘포르쉐 인텔리전트 퍼포먼스’라는 포르쉐만의 철학이있다.
포르쉐 인텔리전트 퍼포먼스는 더 적은 연료로 더 강력한 퍼포먼스를 발휘하는 동시에 보다 적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높은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포르쉐는 모터스포츠에 인텔리전트 퍼포먼스를 적용해 포르쉐 특유의 경량 구조와 유연성, 가속을 위한 준비와 전력 질주의 힘, 민첩성과 정확성을 추구했다. 이 철학은 모터스포츠를 비롯해 미래를 이끌 자동차 개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간 자동차 업계의 변함없는 화두는 ‘친환경’이다. 포르쉐는 친환경의 이슈 또한 포르쉐 인텔리전트 퍼포먼스의 기본 원칙을 바탕으로 접근하고 있다. 모터스포츠에서도 그랬듯이 미래의 자동차 기술에서도 포르쉐는 효율성의 향상을 최우선으로 한다. 미래의 자동차는 대체 엔진을 사용해 강력한 성능을 냄과 동시에 에너지 효율이 높은 차량의 개발을 포괄한다.
포르쉐의 엠블럼은 1952년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탄생했다. 포르쉐를 미국 시장으로 처음 수입한 인물인 막스 호프만(Max Hoffman)은 미국의 자동차들이 모두 엠블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시장의 특성에 따라 포르쉐도 소비자들과 시각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곧 엠블럼의 창안을 요청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장남인 페리 포르쉐 박사(Dr. Ferry Porsche)도 이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앞에 놓인 냅킨에 포르쉐 엠블럼의 아이디어 스케치를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포르쉐 엠블럼의 시초가 되었다.
방패 형태를 하고 있는 포르쉐 엠블럼은 4분할된 방패 도안 안에 각각 검은 말과 나뭇가지 그리고 포르쉐 문자 도안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이 방패는 포르쉐의 근거지인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문장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기에 슈투트가르트가 위치한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주도(과거 바이마르 공국 때 뷔르템베르크 공화국이었던 지방)의 깃발과 문장에서 유래한 블랙, 레드 패턴의 매치, 그리고 나뭇가지의 도안을 차용했다. 페리 포르쉐 박사는 여기에 또 슈투트가르트를 상징하는 동물인 뛰어오르는 검은 말을 그려 넣었다. 사실 슈투트가르트는 자동차 명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기 이전에는 말 사육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패 윗부분에는 포르쉐의 패밀리 네임을 새겨 넣었다. 이렇게 탄생된 엠블럼은 ‘포르쉐 크레스트(포르쉐 문장)’라 불리며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포르쉐의 근거지인 슈투트가르트의 영화와 전통을 하나의 디자인으로 담아낸 이 엠블럼은 처음 의도한 대로 포르쉐의 심장을 시각적으로 빠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전달하는 대표적인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역사상 가장 다이내믹한 브랜드, 아우디
‘기술을 통한 진보’를 슬로건으로 완벽한 기술, 혁신적 아이디어, 창의적인 노력으로 역사상 가장 다이내믹한 브랜드로 평가 받고 있는 아우디는 아우구스트 호르히(August Horch) 박사가 설립했다. 1899년 호르히를 설립했던 아우구스트 호르히 박사는 1909년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고, 이후 ‘듣다’라는 의미를 가진 자신의 이름을 라틴어로 번역해 ‘아우디(Audi)’라는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아우디를 상징하는 4개의 링은 독일 삭소니 지방의 아우디(Audi), 반더러(Wanderer), 호르히(Horch), 데카베(DKW) 4개 회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첫 번째 링이 아우디, 두 번째가 데카베, 세 번째가 호르히, 네번째가 반더러를 상징한다. 이들 4개 회사는 1932년 '아우토 유니언 AG, 켐니츠(Auto Union AG, Chemnitz)'란 회사로 합병돼 현재의 아우디 AG의 초석이 된다. 1959년 다임러-벤츠가 아우토유니온의 지분을 100% 인수했으나 1964년 폭스바겐이 아우토 유니온의 상표권과 사업권 50%를 인수하면서 폭스바겐 그룹의 일원이 됐다.
아우디 브랜드가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에서 아우디는 경제적 위치만으로는 구입할 수 없는 최고 권력을 상징하고 있으며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가 되면서 아우디의 가장 크고 핵심적인 시장이 됐다.
아우디가 프리미엄 자동차 시장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바탕에는 누구도 할 수 없고, 또 시도 조차하지 않는 어려운 목표에 계속해서 도전하는 진보정신이 있다. 일반 도로에서 400km/h 돌파(1937년), 자동차 측면 충돌 테스트(1938년), 최강의 터보 직분사 디젤 TDI 엔진 개발(1989년), 알루미늄 차체 기술 ASF(Audi Space Frame) 개발(1993년) 등은 아우디가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으면서 이룩한 세계 최초의 기록들이다.
남자들의 로망, 람보르기니
최고 성능의 스포츠카를 만들겠다는 창업자의 열정이 담긴 수퍼카의 상징 람보르기니(Automobili Lamborghini S.p.A)는 모든 남자의 로망이기도 하다. 람보르기니의 역사는 창업자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Ferruccio Lamborghini)의 고성능 수퍼카에 대한 열정과 집념에서 비롯된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트랙터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잡는다.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를 사랑했던 페루치오는 자신의 피아트 차량을 개조해 레이싱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자동차광이었지만 처음부터 직접 자동차 회사를 설립할 생각은 아니었다.
람보르기니가 수퍼카 제작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 브랜드인 페라리와의 악연 때문이다. 1960년대 초 페루치오는 당시 인기 스포츠카였던 '페라리 250 GT'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잦은 클러치 결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농기계를 생산했지만 뛰어난 엔지니어였던 페루치오는 페라리의 이런 결함을 알려주기 위해 직접 엔초 페라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호의를 가지고 찾아간 페루치오에게 엔초 페라리는 “당신이 자동차에 대해 뭘 아느냐? 트랙터나 잘 만들라!”는 말로 창피를 주고 말았다.
자신을 최고의 엔지니어로 생각하며 유달리 자신감과 자존심이 강했던 람보르기니는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최고의 수퍼카를 직접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즉각 회사 설립에 착수하여 지금의 본사인 볼로냐 인근에 최고의 시설을 갖춘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최정예 기술자들을 끌어 모았고, 1962년 마침내 람보르기니라는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1963년 람보르기니는 토리노 모터쇼에서 12기통 엔진이 장착된 첫 번째 모델인 350GTV를 공개해 엄청난 반응을 얻게 된다. 그리고 후속 모델인 400GT까지 잇따라 성공시키며 엔초 페라리는 물론 ‘수퍼카를만드는 것은 무모한 시도'라고 비웃던 업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1966년은 람보르기니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해다. 당대 최고의 명차이자 지금까지도 최고의 수퍼카 중 하나로 손꼽히는 미우라가 탄생한 해이기 때문이다. V12 4,000cc 엔진을 탑재한 미우라는 최고 출력 350마력, 최고 속도 280Km/h 로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성능을 발휘하는 진짜 수퍼카였다.
미우라가 수퍼카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더 큰 이유는 최초로 미드십(엔진을 운전석 뒤쪽에 배치해 차량의 전후 밸런스를 이상적으로 맞춘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미우라 이후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를 능가하는 수퍼카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미우라에서 시작된 미드십 방식은 페라리를 비롯해 경쟁사들 대부분이 채택해 지금은 정통 수퍼카의 상징이 됐다.
람보르기니는 1970년대 트랙터 사업 부진과 파업으로 위기를 맞으면서 창업주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1974년 모든 지분을 스위스 투자사에 넘기고 은퇴했다. 페루치오의 은퇴 이후 오일쇼크가 닥치면서 수퍼카의 판매가 크게 감소했고, 결국 1978년 람보르기니는 파산하고 만다.
이후 스위스의 투자가인 밈란 형제가 파산한 람보르기니의 공장을 인수한 이후 카운타크 개발 및 출시를 적극 지원해 다시 부활했고, 크라이슬러로 넘겨진 후 전설적인 수퍼카 디아블로를 출시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모회사였던 크라이슬러의 재정난으로 1994년 인도네시아의 부호인 토미 수하르토가 이끄는 투자자 그룹에 매각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19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로 인해 타격을 입은 수하르토 가문에서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람보르기니는 1998년 8월 아우디에 인수되면서 안정을 찾게 된다. 아우디와 손잡은 이후 람보르기니는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무르시엘라고, 베이비 람보르기니 가야르도 등 수퍼카의 전설적 모델들을 연이어 개발하면서 이 시대 최고의 수퍼카로 성장했다.
모델명 무르시엘라고는 1879년 스페인 투우장에서 투우사의 칼에 24번이나 찔리고도 죽지 않은 황소의 이름이며 스페인어로 '박쥐'를 뜻한다. 가야르도 역시 스페인 투우 역사에서 전설적인 맹우로 명성을 떨친 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상징, BMW
이 시대 최고의 명차를 자부하는 BMW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바이에른의 중심지 뮌헨에서 항공기 엔진 회사를 운영하던 칼라프, 막스 프리츠, 카라프와 구스타프 오토가 합작해 항공기 엔진 메이커인 바이에리쉐 모터제작회사(Bayerische Flugzeugwerke AG)를 설립하면서 태어났다.
1917년에는 '바이에리쉐 모토렌 베르케(Bayerische Motoren Werke)'로 회사명을 바꾸고 약자인 'BMW'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만든 엔진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기에 쓰여 항공기 엔진 제작 분야에서 부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18년에는 'GmbH 유한회사'에서 'AG 주식회사'가 되면서 현재의 'BMWAG' 로 사명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표방하는 BMW는 그 이미지에 맞게 모델명에 있어서도 확실한 숫자 표기를 이용한다. 세단은 '1-3-5-7 시리즈 등 우선 차체 크기에 따라 숫자로 분류한 후 마지막 두 자리에는 배기량을 표기한다. 예를 들어 BMW 최상위 럭셔리 대형 세단인 BMW 760 Li는 7시리즈의 모델이며 배기량 6,000cc를 의미한다.
끝의 ‘L’은 ‘롱바디(Long body)'를 의미하며 ‘i’는 가솔린 엔진이 장착됐음을 나타낸다. 또 Z4의 경우 'Z'은 2인승을 의미하는 독일어의 약자이며, X5에서 ‘X’는 4륜구동을 의미한다. M3, M5의 ‘M'은 Motorsports의 약자로 고성능 스포츠 세단을 의미한다.
BMW는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고 체계화된 브랜드 관리로 유명하다. 스포티한 고성능 세단이 주는 역동적인 이미지, 젊고 세련되며 자신의 삶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타는 성공의 이미지, 단지 운송수단이나 사회적 계급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수단이 아니라 운전하는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다.
BMW는 항공기 엔진에서 모터사이클을 거쳐 자동차 분야로 확장해 왔으며 '하늘에서 땅으로’ ‘두 바퀴에서 네 바퀴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BMW의 엠블럼은 바로 이러한 역사를 담고 있다. 초기에는 항공기 엔진을 생산했기 때문에 엠블럼의 기본 형태는 비행기의 프로펠러 모양에서 형상화됐다.
여기에 BMW 본사가 자리 잡고 있는 바바리아주(州)의 푸른 하늘을 상징하는 청색과 알프스의 흰 눈을 상징하는 백색을 도입해 청백색으로 회전하는 프로펠러 형상의 엠블럼이 완성됐다.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상징으로 선택된 BMW의 모든 차에는 어김없이 BMW의 엠블럼이 부착된다.
엠블럼과 함께 또 하나의 상징은 수많은 자동차들 속에서 BMW를 쉽게 구별해낼 수 있는 독특한 라디에이터 그릴이다. 자동차 전문가가 아니어도 'BMW' 하면 많은 사람들이 2개의 신장 모양을 닮은 '키드니 그릴(Kidney Grille)'을 먼저 떠올린다. 이 디자인은 1931년 일(Ihle) 형제에 의해 2인승 로드스터에 시범적으로 도입됐고, 1933년 베를린 모터쇼에서 소개된 신형 303시리즈에 다시 부착됨으로써 BMW를 특징짓는 상징이 되었다.
BMW의 역사에서 1955년 3륜 소형차였던 이세타(Isetta)와 1959년 700 모델에서 디자인의 특성상 키드니 그릴이 두 차례 생략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BMW사의 대주주였던 헤르베르트 콴트가 이사회에서 키드니 그릴의 고수를 고집했고, 이후 키드니 그릴은 변화하는 자동차 디자인의 형태에 따라 길어지거나 낮아지는 외관상의 변화는 있었지만 기본 형태는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다.
키드니 그릴은 '함부로 변화를 취하기보다는 끊임없는 진화의 과정을 거쳐 정상에 도달하려는' BMW 특유의 남부 독일 마에스트로(장인)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1993년 베른트 피세츠리더(Bernd Pischetsrieder) 회장이 취임한 이후 BMW는 1994년 영국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 로버 그룹(Rover Group)과 롤스로이스, 랜드로버, 로버, MINI 등을 인수해 규모를 키웠다.
특히 1998년 세계적인 수제 브랜드인 롤스로이스를 인수하면서 새로운 본사와 공장을 설립하고 롤스로이스 고유의 디자인과 21세기 BMW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모델 '뉴 팬텀'을 내놓기도 했다. BMW그룹은 2000년 로버와 랜드로버를 각각 피닉스 컨소시엄과 포드에 넘겨 BMW와 MINI, 롤스로이스 등 세 개의 독립적인 프리미엄 브랜드만 남아 있다.
출처 : 브랜드를 알면 자동차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