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브랜드, 메르시데스 벤츠
1888년 모두가 잠든 시간, 한 여성이 허름한 창고의 문을 열고 묘하게 생긴 마차에 몸을 올렸다. 그리고 무려 100Km가 넘는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끄는 말(馬)도 없이 마차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 없이 마차가 달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대,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긴 여성은 칼 벤츠 (Carl Benz)의 아내 베르타 벤츠(Bertha Benz)였다.
남편 칼 벤츠는 독일 니콜라우스 오토가 발명한 세계 최초의 가솔린 엔진 특허를 사들여 스스로 달리는 자동차를 처음 만들어 놓고도 실패가 두려워 공개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잠든 사이 용감한 아내가 직접 자동차를 몰고 나왔고, 드디어 세계 최초의 자동차 ‘페이던트 모터바겐(Patent Motorwagen)’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890년 고틀립 다임러(Gottlieb daimler)가 설립한 다임러와 1883년 칼 벤츠가 설립한 벤츠는 1926년 합병해 다임러-벤츠사로 거듭났다. 다임러-벤츠사 불멸의 브랜드인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 benz)는 이처럼 한 용감한 여성의 행동에서 시작됐고, 말이 끌고 다니는 마차 시대의 종결과 함께 동력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다임러의 이사였던 에믹 옐리넥의 막내딸 이름 ‘메르세데스’와 칼 벤츠의 ‘벤츠’를 딴 메르세데스 벤츠는 고틀립 다임러와 칼 벤츠, 그리고 윌리엄 마이바흐 이 세 사람의 열정으로 빚어낸 창조물이기도 하다.
고틀립 다임러는 1834년 독일 쇠른도르프에서 태어난 총포공 출신으로 1863년 로이틀링겐에 있는 기계제작소 기술감독으로 일하면서 빌헬름 마이바흐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다임러는 1884년 가솔린으로 구동되는 4행정 엔진개발에 성공하고, 1890년 막스 두텐호퍼(Max Duttenhofer), 빌헬름 로렌즈(Wilhelm Lorenz)와 함께 오늘날 메르세데스 벤츠의 전신인 DMG(Daimker Motoren Gesellschaft)를 설립한다.
그러나 자동차 생산에 주력하기를 원했던 다임러와 달리 두텐호퍼는 고정형 엔진 개발을 주장하면서 갈등을 빚었고, 마이바흐와 함께 비밀리에 엔진을 제작하면서 특허는 자신의 이름으로 출원한다. 계속되는 갈등 속에 다임러는 주주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DMG는 기술 개발 부진으로 재정 악화가 시작되어 다임러에게 다시 복귀를 요청한다. 이어 다임러와 마이바흐가 비밀리에 개발한 피닉스 엔진이 대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다임러는 1900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 그의 기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1844년 독일 카를스루에서 태어난 칼 벤츠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지만 어머니의 열성으로 기계공학을 공부하는 공학도로 성장했다. 풍부한 지식 덕분에 칼 벤츠는 수리공에서 공장 감독의 자리까지 빠르게 올랐고, 1871년 기계공이었던 아우구스트 리터(August Ritter)와 함께 만하임에 ‘칼 벤츠와 아우구스트 리터 엔지니어링 작업소’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리터의 신뢰할 수 없는 행동에 질린 칼 벤츠는 아내 베르타 린저의 결혼지참금으로 그와의 관계를 청산하였고, 오랜 목표였던 ‘말이 끌지 않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매진하게 된다.
1879년 마침내 가스 구동방식의 2행정 엔진 개발에 성공한 칼 벤츠는 1882년 만하임 가스 엔진 제작회사를 설립했지만 낮은 지분과 의견 차이로 1년 만에 회사를 떠나게 된다. 1883년 이후 칼 벤츠는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무산되는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가장 좋은 아이디어는 아이디어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그의 소신으로 1906년 ‘칼 벤츠와 아들’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회사 경영을 아들에게 맡긴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를 세상이 인정했음을 비로소 알게 된 때는 그의 나이 80세였다고 한다. 칼 벤츠는 1929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새로 설립한 다임러- 벤츠사에서 중역으로 활동했다.
메르세데스 벤츠 역사에 공헌을 한 사람 가운데 디자인의 제왕,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를 빼놓을 수 없다. 세계 최고의 럭셔리 모델로 유명한 마이바흐의 창업자이기도 한 그는 1846년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열 살의 나이에 고아가 되는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여러 기관을 거치며 성장한 마이바흐는 1864년 고틀립 다임러를 만나 평생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역할 가운데 다임러와 함께 비밀리에 개발한 벨트 구동, 피닉스 엔진과 스프레이 노즐 기화장치 등은 오늘날에도 자동차 핵심 기술로 응용되고 있다. 1907년 DMG를 떠난 마이바흐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전설의 자동차 ‘마이바흐’를 선보이게 된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긴 역사만큼 세계 최고의 자동차 브랜드로 인정을 받고 있다. 많이 파는 것보다 자동차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영철학이 100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덕분이다.
히틀러의 국민차, 폭스바겐
독일 볼프스부르크(Wolfsburg)에 본사를 두고 있는 폭스바겐 그룹은 유럽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로 폭스바겐 브랜드와 함께 아우디,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스코다, 세아트, 스카니아, 폭스바겐 상용차 등 9개의 자동차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는 거대 기업이기도 하다.
폭스바겐의 역사는 193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부자들의 전유물인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선언하고 ‘KdF(Kraft durch Freude)-Wagen(즐거움을 통한 힘-자동차)’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그리고 독일 최고의 엔지니어로 명성을 누린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박사를 담당 책임자로 선정한다.
포르쉐 박사는 히틀러의 프로젝트에 동감을 하면서도 'KdF - Wagen' 대신 '국민차'라는 의미의 '폭스바겐(Volkswagen)'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고, 마침내 1938년 폭스바겐을 설립한다.
포르쉐 박사는 히틀러가 요구한 어른 두명과 세 명의 아이들을 태우고 100Km/h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 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폭스바겐의 엠블럼은 비틀의 엔지니어였던 프란츠 라임스피스(Franz Reimspiess)가 W자 위에 V자가 조합해 공모한 것이 선정되면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독일 국민들을 위해 포르쉐 박사가 개발한 첫 자동차가 그 유명한 비틀(Beetle)이다. 비틀은 히틀러가 생존해 있던 1938년부터 판매가 시작됐지만 본격적인 생산은 전쟁이 끝난 1945년부터다. 이후 25년 동안 포르쉐 박사의 디자인과 엔진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며 총 2,100만 대가 판매됐다. 이는 단일 모델로는 세계 최다 판매 기록이다.
하지만 비틀의 시대는 새로운 타입의 승용차가 속속 개발되기 시작한 1974년부터 막을 내리게 된다. 폭스바겐은 전륜 구동방식에 수냉식 엔진과 안락함, 실용성이 뛰어난 ‘골프’를 개발했고 세계 자동차 시장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작지만 강력한 성능을 갖춘 해치백(트렁크에 문을 단 승용차) 골프는 계층과 연령을 뛰어넘는 새로운 자동차의 표본이 됐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가 됐다.
폭스바겐은 화려함보다는 꾸밈이 없는 일상적인 실용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브랜드다. 히틀러의 국민차로 시작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폭스바겐의 성공 비결은 ‘놀라운 완벽함’ ‘끊임없는 혁신’ ‘일생의 동반자’ ‘인류와 환경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네 가지 핵심 가치에서 비롯됐다.
출처 : 브랜드를 알면 자동차가 보인다